논설위원필사

    [한겨레 유레카] 탈진실 시대의 '무지'와 무시 / 안영춘 논설위원

    [한겨레 유레카] 탈진실 시대의 '무지'와 무시 / 안영춘 논설위원

    ‘무지’와 ‘무시’는 획 하나만 다르지만, 뜻이 가깝다고 느껴지지는 않는다. ‘남’(타자)과 ‘님’의 관계처럼, 우연히 표기만 닮은 거라 여겨진다. 영어 ‘ignorance’(무지)와 ‘ignoring’(무시)을 보면 느낌이 사뭇 다르다. 표기만 닮은 게 아니다. 동사 ‘ignore’는 ‘무지하다’와 ‘무시하다’의 뜻을 모두 갖고 있다. ‘모르는 것’과 ‘알은체하지 않는 것’은 뿌리가 닿아 있다는 듯. 이런 질문을 던져보자. 우리가 모른다고 할 때, 그것은 정말로 모르는 것일까? 철학자 낸시 튜어나는 무지를 4개 영역으로 나눴다. ① 모른다는 것을 알면서도 알고 싶어 하지 않는 것, ② 모른다는 것조차 모르는 것, ③ (특권을 가진) 타인의 바람 때문에 모르는 것, ④ 의도적인 무지(레테나 샬레츨 지음,..

    [경향신문 여적] 기본값의 위력 / 차준철 논설위원

    기본값이란 사용자가 따로 지정하지 않으면 자동으로 선택되는 초기 설정을 말한다. 흔히 ‘디폴트’로 불린다. 문서작성 프로그램의 글자 크기 ‘10포인트’, 인터넷 연결 때 뜨는 특정 브라우저 같은 것들이다. 행동경제학에서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기본값을 바꾸지 않는 것으로 본다. 특별한 이득이 없는 한 현재 주어진 상황을 고수하려는, ‘현상유지 편향’이 작용한다는 것이다. 지정좌석제가 아닌데도 늘 앉던 자리에 앉고, 항상 다니던 길로 출퇴근하는 식이다. ‘아무러면 어때’ 하는 가벼운 심리일 수 있지만, 어찌 보면 ‘귀차니즘’이나 타성이라 할 수도 있다. 이런 성향을 겨냥한 마케팅은 이미 주위에 친숙하다. 영화·동영상 사이트 등의 ‘1개월 무료 체험 이벤트’가 대표 사례다. 무료 기간이 끝나고도 무심결에 구독을..

    [한겨레 유레카] 징벌적 손해배상과 형사처벌 / 박용현 논설위원

    유엔을 비롯한 국제기구와 표현의 자유 옹호단체들은 명예를 훼손하는 언론 보도에 대한 민형사 제재와 관련해 많은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특히 형사처벌은 정당한 보도마저 주저하게 만드는 ‘위축 효과’가 가장 크기 때문에 민주주의 사회에서 용인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유엔인권위원회는 2011년 “회원국들은 명예훼손을 범죄로 다루지 않는 것을 고려해야 하며, 특히 징역형은 결코 적절한 제재 수단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유엔 ‘표현의 자유 특별보고관’은 지속적으로 “형사적 제재, 특히 징역형은 절대 가해져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며 우리나라를 비롯해 명예훼손죄를 두고 있는 국가에 폐지를 권고해왔다. 이에 따라 세계적으로 명예훼손에 대한 형사처벌을 폐지하는 나라들이 늘고 있다. 영국에서는 1970년대 이후 명예훼손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