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값이란 사용자가 따로 지정하지 않으면 자동으로 선택되는 초기 설정을 말한다. 흔히 ‘디폴트’로 불린다. 문서작성 프로그램의 글자 크기 ‘10포인트’, 인터넷 연결 때 뜨는 특정 브라우저 같은 것들이다. 행동경제학에서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기본값을 바꾸지 않는 것으로 본다. 특별한 이득이 없는 한 현재 주어진 상황을 고수하려는, ‘현상유지 편향’이 작용한다는 것이다. 지정좌석제가 아닌데도 늘 앉던 자리에 앉고, 항상 다니던 길로 출퇴근하는 식이다. ‘아무러면 어때’ 하는 가벼운 심리일 수 있지만, 어찌 보면 ‘귀차니즘’이나 타성이라 할 수도 있다.
이런 성향을 겨냥한 마케팅은 이미 주위에 친숙하다. 영화·동영상 사이트 등의 ‘1개월 무료 체험 이벤트’가 대표 사례다. 무료 기간이 끝나고도 무심결에 구독을 유지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리처드 탈러 교수는 저서 <넛지>에서 기본값 설정의 힘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그 힘을 이용해 사용자들이 이로운 선택을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기본값을 정하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녹색연합에 따르면 배달의민족·요기요·쿠팡이츠 등 배달앱 3사의 일회용 수저 주문이 지난 6월 한 달간 6500만건 이상 줄어들었다고 한다. 6월1일부터 일회용 수저 ‘받기’가 아니라 ‘안 받기’를 기본값으로 바꾼 결과다. 지난해 6월과 비교하면 일회용 수저를 주문하지 않은 비율이 13~21%에서 62~73%로 급증했다. 기본값만 바꿨을 뿐인데 기대 이상의 결과가 나온 것이다. ‘착한 기본값’이 소비자들의 긍정적인 행동 변화를 이끌 수 있음을 보여줬다. 소비자들은 기본값을 암묵적인 권고 메시지로 받아들일 수 있다.
물론 논란의 소지는 있다. 불순한 의도가 개입한 ‘나쁜 기본값’이 정해지면 피해는 고스란히 소비자들에게 돌아올 수 있어서다. 잊기 쉽고 까다로운 해지 조건을 슬쩍 붙여 추후 소액 결제를 유도하는 사이트들이 그렇다. 기본값을 악용하는 업체들은 발붙일 수 없게 만들어야 한다. 이번 사례는 착한 기본값이 사회에 유익한 결과를 내는 방향으로 작동할 수 있음을 증명했다. 금지하고 규제하거나 인센티브를 주는 것보다 선택을 돕는 게 효과가 큰 점을 눈여겨볼 일이다.
[참조]
https://www.khan.co.kr/opinion/yeojeok/article/202108262041005
[여적] 기본값의 위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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